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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마지막 날. 프릳츠 양재에 와 있다. 멋진 장소에서 따뜻한 생강차와 커피, 도너츠를 시켜놓고 여러 나라에 있는 학생들과,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따뜻하게 연말을 마무리할 수 있다니 뭐가 더 필요하담ㅎㅎㅎ 12월에 일어난 온갖 악재가 무색하리만큼 평화로운 마지막 날.
올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게 괴로운 일도 많았고 입이 귀에 걸리게 행복한 일도 많았다. 올해를 돌아보면 연초에 달리다가 건강 망치고 현실에 순응하며 만족하는 듯 불만족하는 듯 열심히 사는 듯 유유자적하는 듯 언제나 그렇듯 오고 가는 번민은 많았지만 나름대로 평화롭게 지낸 것 같다. 위장은 회생불가인 것 같지만 나름 운동도 꾸준히 하려고 노력했고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일을 유지하며 학생들과 즐겁게 수업했다. (학생들도 즐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것 같다.)
과거를 회상할 때면 늘상 느끼는 거지만 내 상황이 어떻고 마음이 어떻든지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항상 그 자리에서 작은 위로와 행복을 주며 내게 나아갈 힘을 보태주었다. 연둣빛 봄의 따스함과 생기, 초록빛 여름의 시원한 그늘과 청량함, 주황빛 가을의 낙엽 냄새와 기분 좋은 스산함, 하얀빛 겨울의 찬 바람과 상쾌함. 올해도 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느끼며 순간순간 작은 기쁨들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과하게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해준 나의 하릴없는 이상적임과 안일함도 오늘은 비난하고 싶지 않다.
변화를 원한다면서도 두려움에 게으름에 버티고 앉아 있던 나를, 삶이 인형 뽑기 하듯 들어 날라 새로운 곳에 데려다 놓았다. The Surrender Experiment. 고의로 실험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그런 것도 같다. 될 일은 된다. 새해에는 새 방향으로 조금 더 확실하게 노를 저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안정성도 좋지만 반 정도는 끌려다니고 있는 생활은 조만간 청산하고 싶다.
작년처럼 올해도 연말 맞이 길상사 방문을 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고 없던 자비심이 생겨 이해할 수 없던 상황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절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짧게 묵례를 하고,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삶에 나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부처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죽비로 정수리를 한 대 맞는 것 같은 법정스님이 계셨던 진영각 앞에 놓인 새해 달력을 사고 절밥을 먹는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실은 나이가 들면서 내일이 새해라고 해서 엄청난 다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거나 설렌다거나 지나간 한 해가 무척 아쉽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냥 시간이 속절없이 빠르니 힘들어도 즐거운 일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이다. 내년에도 요가와 수영을 꾸준히 하고 근육맨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지. 그리고 나도 즐겁고 남도 즐겁게 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힘들더라도 즐겁고 건강하기, 그게 내 다짐이다!